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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잔액을 보며 "이게 다야?" 싶었던 순간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왜 돈은 늘 제자리인지, 막연하게 '더 벌어야지'가 아니라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화폐의 역사를 파고들었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이 보였습니다.
화폐 기원 — 차 한 덩이가 돈이 되던 시절
돈이 처음부터 지폐나 동전이었던 건 아닙니다. 고비 사막 인근 아시아에서는 압축 성형한 중국차, 즉 전차(磚茶)가 화폐로 사용됐습니다. 갓 딴 잎을 쪄서 가루로 만든 뒤 일정한 무게로 굳혀 낸 것인데, 몽골에서는 전차 12~15개면 양 한 마리, 티베트에서는 12~150개면 낙타 한 마리와 교환이 됐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솔직히 조금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 한 덩이가 돈이라니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완전히 논리적입니다. 교환 매개물(medium of exchange)로 기능하려면 일정한 가치를 인정받고, 오래 보관이 가능하며, 크기와 무게가 균일해야 합니다. 전차는 세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여기서 교환 매개물이란 거래 당사자 모두가 가치를 인정해 물건이나 서비스를 주고받을 때 중간에서 사용되는 수단을 말합니다.
이후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목격한 것은 더 혁신적이었습니다. 종이에 숫자를 적어 가치를 부여한 명목화폐(fiat money)가 실제로 유통되고 있었던 겁니다. 명목화폐란 그 종이 자체에 실물 가치는 없지만, 국가가 보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고 쓰는 화폐를 말합니다.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는 송나라 쓰촨 지역에서 탄생했고, 2023년이 바로 교자 등장 1,0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엽전 한 개가 약 15g이었고 쌀 한 말을 사려면 엽전 천 개, 즉 15kg을 들고 다녀야 했으니 종이돈이 나타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 전차(磚茶): 무게 균일, 장기 보관 가능 → 교환 매개물로 기능
- 교자(交子): 세계 최초 지폐, 송나라 쓰촨에서 탄생, 2023년 1,000주년
- 명목화폐: 실물 가치 없이 국가 보증만으로 통용되는 화폐
- 금본위제: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로 금 1온스 = 35달러에 고정
신용창조 — 100만 원이 343만 원이 되는 원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세계는 하나의 합의를 만들어냈습니다. 금 1온스를 미국 달러 35달러에 고정하고,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연동시키는 금본위제(gold standard)입니다. 금본위제란 화폐의 가치를 실물인 금의 양에 연결해 보증하는 통화 제도를 의미합니다. 이 체제는 1971년 닉슨 대통령의 선언으로 사실상 해체됩니다. 금이라는 닻이 사라지자 돈은 비로소 속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현대 금융의 가장 흥미로운 구조가 등장합니다. 신용창조(credit creation)입니다. 여기서 신용창조란 은행이 예금을 받아 그 일부만 남기고 대출해주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처음 발행된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시중에 생겨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수치로 보면 더 명확합니다.
중앙은행이 100만 원을 발행합니다. 은행은 지급준비율(reserve requirement) 10%인 10만 원만 남기고 90만 원을 대출합니다. 지급준비율이란 은행이 예금액 중 반드시 보유해야 하는 최소 비율을 의미합니다. 대출받은 90만 원이 다시 은행에 예금되면, 그 은행도 9만 원만 남기고 81만 원을 빌려줍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최초 100만 원은 343만 9,000원이 됩니다. 철이나 금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명목화폐이기 때문에 가능한 마법입니다.
제가 이 구조를 처음 이해했을 때 솔직히 약간 불안해졌습니다. 제 통장 잔액이 실제로 거기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그러면 돈을 제대로 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재테크 — 돈의 작동 원리를 모르면 수익률 숫자에 속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해 캐나다, 영국, 일본, 유럽중앙은행(ECB)까지 전례 없는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했습니다(출처: 미국 연방준비제도). 유동성(liquidity)이란 자산을 빠르게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시중에 돈이 얼마나 자유롭게 흐르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이 돈은 주식시장으로, 가상화폐 시장으로, 부동산으로 쏟아졌습니다. 코스피가 급등했고, 2030세대의 아파트 매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이 시기입니다.
같은 구조는 송나라에서도 반복됐습니다. 평소 125만 관에서 250만 관 사이로 통화량을 엄격하게 관리하던 송나라가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교자를 마구 발행한 순간, 인플레이션(inflation), 즉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현상이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을 무한정 찍어내는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출처: 국제결제은행(BIS)).
저는 혼자 살아가는 미래를 생각했을 때, 월급만으로 노후까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일찍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재테크를 시작해보려 했는데, 제 경험상 수익률 숫자만 보고 달려드는 건 정말 위험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유동성이 줄어드는 국면이 오면 그 수익률이 어떻게 증발하는지, 지금의 시스템이 어떤 믿음 위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앞으로 투자를 할 때 가장 먼저 살피고 싶은 것은 단 하나입니다. "지금 시중에 돈이 얼마나 풀려 있고,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것만 파악해도 최소한 군중이 쏠리는 방향의 반대편에 서는 실수는 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세계 최초의 지폐는 어디서 만들어졌나요?
A. 중국 송나라 쓰촨 지역에서 탄생한 교자(交子)가 세계 최초의 지폐로 알려져 있습니다. 2023년이 교자 등장 1,0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교자는 실물 철전과 교환이 보장됐다는 점에서, 오늘날 완전한 명목화폐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Q. 신용창조가 뭔지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A. 은행이 예금의 일부(지급준비율)만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해주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처음 발행된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경제 안에서 유통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이 100만 원만 찍어도, 이 과정이 반복되면 시중에는 수백만 원이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금속 화폐로는 불가능하고, 명목화폐 체제에서만 가능한 구조입니다.
Q.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돈의 가치는 어떻게 유지되나요?
A. 금이라는 실물 담보가 사라진 이후 돈의 가치는 국가에 대한 신뢰, 그리고 '남들도 이 돈을 쓴다'는 집단적 믿음으로 유지됩니다.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적절히 조절하고 금융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 믿음이 지속됩니다. 반대로 신뢰가 무너지면 화폐 가치도 빠르게 붕괴합니다.
Q. 돈을 불리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A. 수익률 숫자를 보기 전에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로 흐르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특히 현재 시중 유동성 수준과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방향을 파악하면, 어떤 자산이 과열돼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기초 개념 없이 수익률만 좇으면 군중이 가장 붐비는 시점에 진입하는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결론
돈을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돈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이전에는 '어떻게 더 벌까'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이 돈이 어떤 믿음 위에 서 있고,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나'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전차가 돈이 됐던 이유도, 교자가 세상을 바꾼 이유도, 결국 시스템에 대한 신뢰였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 일을 못하게 되는 미래에도 돈이 저 대신 일하게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더 분명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경제적 여유가 생긴다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돕는 데도 쓰고 싶습니다. 돈을 이해하는 것이 결국 그 꿈에 다가가는 가장 현실적인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